나는 현재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있으며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대학생이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교내에 있는 인문학술 동아리를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고 학점도 꽉꽉 채워서 듣고 있다 보니 부담이 된다는 건 사실이지만, 학부 졸업 전에 꼭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고민 끝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동아리는 한 달에 2~3번정도 모여서 고전을 읽고 토론하거나 관련 세미나를 듣는 활동을 한다. 아무래도 구성원들이 대부분 인문계열, 사회계열, 어문계열이고 나 같은 공대생이 처음에 면접을 보러 가니까 다들 신기한 듯이 쳐다본 기억이 난다. 면접 때 받았던 질문들 중에 하나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물론 이 질문은 대부분 다른 면접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묻는 질문 중 하나다.
“왜 인문학 동아리에 지원하셨나요?”
그 당시에는 약간 긴장하기도 해서 횡설수설 대답을 한 것 같다. 다양한 학과의 사람들과 인문학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었다… 고전을 더 깊이 있게 읽어보고 싶었다…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피상적인 이유 외에 나는 마음 속 깊숙이 더 커다란 이유가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그 이유가 면접관 분들에게 전달이 되었기에 이 동아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공대생은 거의 없었고 나이도 심지어 내가 제일 많았다.(이건 빨리 졸업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동아리에 들어가서 내가 처음 읽은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다. 정말 정말 어려웠다. 책 한 페이지 넘어가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읽었던 책은 플라톤의 <향연>이었다. 고대 그리스에 똑똑한 사람이 새삼 참 많았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이 책을 읽고 다른 학우분들과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내 지식의 깊이가 얼마나 얕았는지 느끼게 되었다. 웃긴 이야기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토론을 하면서 이렇게 멍청한 나를 뽑아준 우리 학교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서론은 이정도로 마무리 짓고, 이제부터 내가 4학년 막학기에도 이렇게 무리해서(?) 철학 고전을 읽고 토론을 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조금 길어질 수도 있다.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나누어서 쓸 생각이다.
고등학교 때 참 공부를 열심히 했다. 엄청 잘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못 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정도로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입시에 대해 불만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왜 학생들을 굳이 이렇게 줄 세워서 순위를 매겨야 하지? 학생들도 스트레스 받고 과연 실질적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일까?’ 이러한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너가 그런 생각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열심히 공부해라. 나중에 좋은 대학에 가고 성공한 어른이 되어서 문제를 제기해라.’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러한 어른들 또는 친구들의 대답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그래도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나는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첫 1년간은 정말 아무 고민걱정 없이 즐기면서 살았다. 하고싶은 것을 다 하면서 지냈고 새내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만끽했었다. 내가 속한 학부는 2학년부터 전공수업을 듣고 1학년 때는 전공기초교양(일반물리학, 일반화학, 미적분학 등)과 영어, 글쓰기 등의 수업만 듣는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당시에는 내가 이 전공으로 뭘 배우고 어떠한 분야가 있는지 정확히 몰랐고, 고등학교 때까지 알던 (정말 얄팍한) 지식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공부 말고 재밌는게 너무 많아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미친듯이 놀았다.
그렇게 찬란한 새내기 라이프가 끝나고 2학년 헌내기가 되었다. 지금은 낡아서 없어진 건물에서 당시 첫 전공수업인 ‘재료 구조 물성’을 들었다. 당시만 해도 군대가기 전 학기였고 그 수업 끝나고 새내기 후배들과 할 밥약 생각에 솔직히 수업을 집중해서 듣지는 않았다. 그런데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건 내가 생각하던 전공이 아닌데?”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고, 배우는 내용은 어렵고 재미가 없었다. 수업은 지루했고 숙제는 베끼기 바빴으며 공부를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동아리나 대외활동, 과외 등에 시간을 쏟느라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수업 때 너무 많이 자서 조교님한테 불려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보낸 2학년 1학기의 학점은 당연히 좋지 않았고, 나는 그 학기가 끝남과 동시에 공군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군 생활은 다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고 끔찍했다. 별로 쓰고 싶은 말도 없고 기억을 애써 꺼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끔찍했던 군 생활에서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생각보다(?) 독서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생활관 안에 있는 작은 휴게실에는 ‘진중문고’라는 책들이 꽃혀 있는 작은 책장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독서실이 있어서 나는 TV 보거나 싸지방 하는 시간보다 독서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스스로 읽은 내용을 기억하고 싶어서 책을 읽고 한 두페이지 정도로 짧게 독후감 비슷한 걸 썼는데 훈련소, 특기학교 기간 빼고 약 1년 9개월동안 70권 정도를 읽었던 것 같다. 거의 일주일에 한권씩 읽은 셈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역 후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전역을 하고 참 바쁘게 살았다. 학회에서 회장도 하고, 영국으로 교환학생도 다녀왔다. 하나의 단체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으며 책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리더십을 배웠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역량인지 절실히 깨달았으며, 교환학생 경험을 통해서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 였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본전공이 맞지 않음을 느끼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컴퓨터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더욱더 열심히 했고 정신차려 보니 어느덧 나는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게 되었다. 대학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나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 가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가?”
내 본전공인 신소재공학부 동기들은 지금 열심히 취업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대부분 가고 싶어하는 기업들은 비슷비슷하다. 다 한 번씩은 적어도 들어본 회사들이고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기업들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대한민국에서 학부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나도 이 친구들처럼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고 어긋나지 않는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취업을 하고 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서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질 것이며 그러면 지금 내가 가진 고민들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고민이 다 풀릴 줄 알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가진 고민들을 유예시키지 않기로 했고 지금 더 깊게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학교에서 배운 공학, 수학, 과학 지식만으로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인문학을 그냥 암기하는 과목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 속에서, 그리고 주변 상황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방법으로 배우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인문학 동아리를 들어간 이유이고 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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