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시절 역사를 교과서로 배웠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까지는 말이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는 뭔가 하나의 정답이 있고 우리는 그걸 열심히 외우고 암기하면 역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무살, 나는 대학을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면서 사회에는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이상의 정답이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우리 학교에서 시작이 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철도 민영화 반대 대자보를 보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와 동떨어진 일이 아니며 내 또래들과 나보다 고작 몇 년 더 산 선배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위해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이듬해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나는 그 사건을 보고 몇 달 있다가 군 입대를 했다. 전역을 하고 얼마 안 있다가 촛불 시위가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스무살 이후에 배운 역사는 교과서가 아닌 삶으로 느낀 역사였다.
이 책을 내가 선택해서 읽은 이유는 단 하나. 그 이유는 유시민이라는 작가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그 분과 나의 성향이 비슷해서도 아니며, 이 책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서술했기 때문도 아니다. 한 사람이 지난 60여 년의 한국 역사를 어떻게 봐왔고 경험하였는지를 알고 싶었고 거기에서 배울 점은 배우며 버릴 점은 버리고 또 과거와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해서 읽기 시작했다. 유시민이라는 그래도 꽤 똑똑하고 현명한 한 지식인이 내가 태어나고 올바른 인식을 가지기 이전인 2014년까지의 역사를 어떤 자세로 보아 왔는지를 토대로 2014년 이후는 내가 나의 자세로 역사를 바라보고 싶다.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 토크빌 (Alexis de Toqueville, 프랑스 정치가)
1950년대와 60년대 초 우리나라는 정말정말 가난했다. 전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가난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경제 성장을 하는 것에 가장 초점을 맞추고 이를 위해서라면 지금 우리가 보기에 부조리하거나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되는 일들도 일어날 수가 있었다. 구한말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언론 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을 했었고, 백여년 전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운동에 힘쓰고 임시정부의 대통령까지 지냈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 역시 복잡한 냉전 시대의 국제정세 속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을 일으켜 보기 위한 많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을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냈고 이는 업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 21세기의 우리가 보기에 올바르지 않은 방법, 예를 들어 독재, 부패, 부정선거 등을 통해서 권력을 유지하면서 무고한 국민들을 살상했고 친일 세력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4.19와 5.16은 이러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기 역사에서 그의 당시 국민적 정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이러한 사건을 파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종합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만 참 중요한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1970년대에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다. 혹자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에서 무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대한민국이 잘 사는 나라가 절대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현재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 예컨데 빈부격차, 경쟁사회, 재벌 대기업의 횡포,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 등이 박정희의 독재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MIT 교수이자 통계분석 전문가였던 로스토(Walt Whitman Rostow) 박사가 산업혁명 전후 영국의 경제통계를 분석해 특정한 경제성장 패턴을 참고해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로스토는 마르크스와 거의 대척점에 위치하여 이론을 펼쳤는데 경제를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계급 투쟁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는 주장을 통해 많은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정치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이론을 따랐지만 이륙(take-off)하지 못한 국가들도 많이 있으며, 대한민국은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성공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가의 부가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측정하는 데에는 국민총생산, 국내총생산, 국민총소득과 같은 지표를 사용한다. 이러한 지표들이 그나마 가장 낫기에 사용을 하긴 하지만, 여기에도 결함은 있다. 생산을 하느라 자연과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국민의 복지와 후생을 해치는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 effect)'는 여기에 반영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거래했더라도 그 자체가 불법이거나 탈세를 목적으로 일부러 자료를 남기지 않는 '지하경제'도 여기에는 빠져있다. 우리가 지표를 중요하게 봐야 하지만, 지표를 맹신하면 안 되는 이유다.
70년대 당시 한국 경제는 지금처럼 시장경제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산업화 이전에는 대한민국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수익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가야 하는 것이 맞지만 당시에는 정부에서 모든 자금을 흐름을 관리했고 정경유착과 부패가 없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나는 이 모습이 좋다/나쁘다를 평가하는 것은 2021년 지금 시점에서 크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알아야 할 점은 대한민국이 당시에는 지금과 상당히 (낙후된)다른 상황이었으며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는 과거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으며 이제는 조금 더 시야를 전세계로 넓혀서 global standard를 따라가야 한다는 점이다. 재벌이 일상을 지배하고 이 모든 것들이 대한민국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모습은 단기간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생겨난 성장통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80년대에는 '제5공화국' 체제가 이루어지고 유신 체제가 연장이 되면서 이 시기에 국제 경제환경은 무척 좋았다. 특히 80년대 중반에는 '3저 호황'의 시기로 낮은 달러 가치, 낮은 국제 유가, 낮은 국제 금리의 영향으로 한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민주화가 진전이 되면서 노동자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임금, 근로조건이 개선되었다. 이어서 90년대 중반까지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간 소비와 기업의 실비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 시기 정부는 냉전시대에 구축한 '자본주의적 계획 경제'를 '개방적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외국환 거래와 민간 기업의 해외 금융채무 취득 등을 비롯한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 시기까지 한국 경제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널리 퍼졌지만, 그 이면에 경제 위기의 위험이 있을 것을 인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살펴보면 정부가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구제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축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으로 볼 수 있다. 규제의 족쇄에서 풀려난 한국의 금융기업들은 선진국에서 이자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단기외채를 얻어 금리가 높은 동남아 기업에 장기대출을 함으로써 이윤을 남겼다. 그러다 동남아 국가들이 줄줄이 외환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재벌그룹들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 die)' 재벌이 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점이었다. 삼성, 현대, SK, LG와 같은 재벌 그룹이 망하면 수 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기관이 망하고 여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실업자가 된다. 따라서 정부는 재벌이 위기에 빠지면 구해 주어야 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재벌이 이익을 사유화 하고 손실은 사회화 하는 행동을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 때마다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시켰다. IMF를 겪으면서 많은 재벌그룹들이 해체되었지만, 남아있는 재벌그룹들은 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대량실업의 공포가 노동시장을 뒤덮자 노동조합은 더욱 약해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여러가지 거시경제 지표들은 나쁘지 않은 흐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실질적 경제생활은 거시경제지표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 지표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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