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는 죽었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이방인>의 원문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의 엄마가 죽은 사건으로 시작해서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은 뫼르소의 죽음까지 짧은 소설이지만 그 안에서 죽음이 여럿 나온다. 작품 해설을 읽어보니 이 문장을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숙명에 직면한, 엄마의 배에서 나온 인간 존재 자체의 실존에서 엿보이는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끌고 있다."고 설명을 하는데... 나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방인>은 쉬운 소설은 아니다, 확실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뫼르소는 사장에게 휴가계를 낸다. 그런 뫼르소에게 사장은 무정하고 냉담하다. 이는 곧 사장이 뫼르소를 둘러싼 사회를 대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사장은 뫼르소에게 다른 직장인들처럼 활발하고 야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주문한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로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고 단정짓는 사회 속 타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회가 정형성을 벗어난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질책하는 폭력적 성질은 사장이 뫼르소의 휴가계를 수리하면서 애도의 감정이 아닌 공백으로 인한 난색을 표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뫼르소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내 탓은 아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보통 사람들하고 다르다. 아니 정확히는 사회가 뫼르소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해 낯설게 느끼는 자'로 규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뫼르소는 의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어머니의 장례식을 가서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지 않는다.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슬픔을 눈물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외부에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행동은 소설 뒷부분 이어지는 재판과정에서 뫼르소가 유죄를 선고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어찌어찌 뫼르소는 장례식을 마쳤고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아직 상중이긴 하지만 토요일이었고 뫼르소는 모처럼 주어진 휴가에 해수욕을 하러 간다. 거기에서 마리 카르도나를 만나고 둘은 그날 밤 서로 사랑을 한다. 사실 뫼르소는 평소에 직장동료인 마리에게 호감이 있었고, 어찌어찌 휴일에 만나서 데이트를 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나중 재판에서, 어머니 장례식 바로 다음날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계획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법원의 판단을 이끌어 낸다.
뫼르소는 월요일, 같은 층에 살던 이웃 살라마노 영감 그리고 레이몽을 만난다. 살라마노 영감은 아내와 사별 후 계속 키우던 늙은 개를 잃어버려서 슬퍼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뫼르소는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레이몽의 경우 아내가 변심한 것을 눈치채고 뫼르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내의 친오빠가 속해 있는 아랍인 패거리가 레몽을 미행하고 결국 그들은 싸움을 일으키는데 이 과정에서 레이몽은 한 아랍인에 의해 칼에 찔린다. 뫼르소는 이 소동이 끝나고 걷던 중 우연히 레이몽을 찌른 아랍인을 만나는데, 여기서 자신도 모르게 그 남성을 권총으로 쏴서 죽이게 된다.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네 발의 총성이 내게는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았다.
결국 뫼르소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이 소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쏘는 시점까지 1부, 재판을 받기 시작하는 과정부터 2부로 나뉘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는 과거에 어머니의 장례식 때 울지 않았던 점, 어머니의 시신을 보기를 거부했다는 점 등등 심문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알게 된다. 검사는 이러한 심문 내용을 통해 피고의 '냉담함'을 고발한다. 그가 보기에는 뫼르소가 범죄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뫼르소는 재판을 받는 내내,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 사람들은 그에 대한 말을 하면서도, 정작 뫼르소 본인에게는 의견을 묻지 않는다. 까뮈는 실제로 이 작품에 대해 "모든 문제는 삶의 논리와 법률의 논리, 삶의 무대(실제)와 연극 무대(유희) 사이의 간극 때문에 발생한다." 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예심판사가 뫼르소의 계획 살인 혐의를 확정하기 위해서 심문 과정 중 기독교와 그리스도를 언급하며 훈계를 늘어놓는데 과연 판사가 들이대는 종교적 잣대가 이 틈새를 설명하기에 충분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검사가 피고인을 냉혈한으로 몰아붙이고 왜 아랍인을 사살했는지 심문할 때 뫼르소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을 십분 느끼면서,
빠르고 좀 조리없는 말투로 그건 태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배심원들은 크게 웃는다. 하지만 여기에도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 뫼르소는 유독 태양에 대해 저항력이 약한 것으로 소설에서 묘사된다. 장례 도중 발인을 할 때 햇빛이 강렬해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장례 예식을 갖추지 않는다. 이를 검사가 피고를 심문하며 몰아붙일 때 이용하고 뫼르소는 위와 같이 논리, 인과관계가 없는 대답을 한다. 뫼르소의 살인 계기는 논리와 인과 관계에서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는 어떠한 인간적 관념에 구속되지 않고 살인을 저질렀음을 이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뫼르소는 형무소 부속 사제의 면회를 계속 거절을 하다, 결국 사제의 면회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뫼르소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인정하게 된다.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뫼르소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일절 취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이기에 죽음이 엄습해오는 시간들이 두려운 것은 맞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회상하며 생전 그녀의 삶을 반추하다가 결국 죽음마저도 초월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마지막 관점을 통해 우리는 각기 다른 가치가 있어서 소중하고 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그처럼 나와 닮았다는 것을,
요컨대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까지 읽은 후 나는 이 소설을 온전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몇 가지 든 생각을 정리하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혹은 나 자신이 '뫼르소'와 같은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사회적 이념과 잣대에 익숙해져 있고 그에서 벗어나는 삶은 가치가 떨어지고 존중받지 못한 삶이라고 판단한 적은 없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뫼르소는 누가 보기에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고 지금 이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소위 '또라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잘못된 것인가? 보편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고, 사회적 통념을 따르지 않는 다는 명목하에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다면, 사회는 점점 경직되고 역동성을 잃게 될 것이 뻔하다. 소설 제목 그대로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뫼르소를 보면서 우리 내면에는 '뫼르소'와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았는지 혹은, 우리 주변에 '뫼르소'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한 적은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